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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문화역사박물관 / 금산여행 / 아이와 가볼만한곳places to visit 2023. 11. 7. 13:55반응형
최근 들어 금산을 자주 방문하며 구석구석 여행 중이다
어떤 도시를 가게 된다면 제일 먼저 박물관을 찾아간다
깊은 지식을 쌓기 위한 방문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훑고 나면 그 도시를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이번 방문을 꼭 선택한 이유는 금산역사박물관에서 이치대첩 특별전이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금산역사박물관 소개와 함께 이치대첩 특별전을 남겨보려고 한다
금산문화역사박물관 /
이치대접 특별전
■ 위치
충남 금산군 금산읍 금산로 1575
■ 주차장
박물관 앞 주차장 사용 가능 / 무료
■ 운영시간
- 9:00 ~ 18:00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당일, 추석 당일 휴관
■ 입장료 ㅣ 무료
■ 상세정보
1층 / 금산역사관
선사시대실
* 금산의 선사시대
금산은 노령산맥을 이루는 높은 산들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으며, 안으로는 금강의 물길을 따라 비옥한 분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풍요로운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금산에는 예로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구석기인이 첫 발을 내딛은 이후 청동기시대부터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철기시대에는 마한의 세력범위에 속하였으며 4세기경 백제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 금산 수당리유적은 1999년과 2004년 두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적이다 금강 지류인 조정천을 사이에 두고 나지막한 구릉에 위치하고 있어 인류가 정착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환경을 바탕으로 청동기시대부터 통일신라까지 다양한 생활유적이 형성되었다
그중 백제시기에 해당하는 유구는 주거지, 돌널무덤, 돌방무덤 등 총 19기이다 주거지에서는 마한계 두드림무늬토기와 한성백제양식 토기가 함께 출토되었으며 무덤에서는 중국제 흑갈유도기편과 둥근고리 큰 칼 살포와 다랑의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유물로 보아 수당리 유적의 조성집단은 지배층이었으며 한성백제의 영향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유적의 연대는 5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금산은 마한과 가야, 신라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로써 다양한 문화가 서로 교류하고 있었다 5세기경, 백제는 금산에 진출하여 금산, 진안을 통해 가야로 연결되는 내륙 교통로를 장악하였다
수당리유적의 발굴 이전에는 한성백제시기 금산지역의 위상을 알 수 없었으나 살포, 큰칼, 중국제 자기 등의 위세품이 출토됨으로써 백제중앙으로부터 직접 지배권을 인정받은 교통로상의 주요 거점이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삼국시대실
* 금산의 삼국시대
삼국시대 금산지역은 처음 백제와 관계를 맺은 후 백제가 고대국가로 성장해 나감에 따라 그 영역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산 수당리 유적에서 발견된 살포와 둥근고리큰칼, 흑갈유도기편 등은 적어도 5세기 무렵 수당리의 토착세력이 백제 중앙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백제가 수도를 공주, 부여로 옮기고 삼국 간 경쟁이 본격화되는 6세기 이후 금산지역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역으로 백령산성 등이 축조되었다 금산지역은 신라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수도를 방비하는 첫 번째 관문이자 때로는 백제의 영호남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가능하였다고 추정된다
이와 같은 금산의 위상은 수당리 유적과 창평리 유적의 가야토기와 장대리 유적과 신라토기의 사례에서처럼 백제·신라·가야의 고대 각국간 문화교류의 관문의 역할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 백제의 천도와 금산
475년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해 수도 한성이 함락되었고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다 금강유역으로 수도를 옮긴 백제는 금강유역을 기반으로 지방지배를 강화하였다 이때부터 금강 상류지역에 위치한 금산지역도 백제의 직접적인 지방통치체계에 편입되었다고 추정된다 6세기 이후 백제는 신라와 치열한 전쟁을 지속하는데 금산지역은 백제의 동쪽 경계를 담당하는 요충지로써 삼국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이 다수 남아있다 백령산성과 장대리 고분군은 발굴조사를 통해 그 전모가 밝혀졌는데 백령산성은 백제 말기에 사용된 유적이며 장대리는 신라 계통의 고분으로 밝혀져 금산지역에서 백제와 신라의 각축전이 활발하게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 금산의 신라·가야토기
금산지역은 백제와 신라, 가야의 세 나라의 흔적이 모두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각국의 토기로 금산 수당리 유적에서는 백제토기가 창평리유적에서는 가야토기, 장대리고분군에서는 신라토기가 발견되었다 금산지역은 삼국시대 대체로 백제의 영역이었으므로 수당리유적의 사례에서처럼 백제토기가 출퇴되는 것은 일반적이다
창평리유적의 가야토기는 5세기 백제와 가야의 교류가 금산지역을 거쳐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장대리고분군의 신라토기는 6세기 중엽 백제가 관산성 전투에 패한 후 신라가 금산지역에 진출하였던 증거라 할 수 있다
백제토기는 고구려, 신라, 가야 등과 비교하면 매우 다양한 기종이 확인되며 장식성이 강하지 않고 단순한 것이 특징이다 신라, 가야토기는 장식성이 강한 것이 특징으로 인물모양 토기, 오리모양 토기 등 다양한 형태가 나타나며 물결무늬, 원점무늬, 투창 등으로 표면을 장식했다
가야토기는 소국마다 다른 특징을 가지는데 금산에서는 대가야양식의 긴목항아리가 출토되었다 장대리 유적의 신라토기는 6세기 이후 나타나는 신라 후기 양식으로 아가리가 꺾인 형태의 긴목항아리가 특징이다
* 요충지 백령성
금산 백령성은 남이면 역평리 성재산 정상에 위치한 둘레 207미터의 돌로 쌓은 백제의 산성이다 백령성은 백제와 신라가 국경을 마주한 접경지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백제의 동쪽 국경을 방비하던 주요 방어시설로 추정된다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로 성문과 성벽, 치, 목곽시설과 구들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성 내부에서는 많은 수의 글씨가 적힌 기와편과 토기편, 목기, 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성의 한가운데에서 발견된 목곽시설은 공주 공산성, 대전 월평동산성, 부여 관북리유적 등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백령성은 7세기 백제와 신라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수도 사비를 방비하는 첫 번째 관문으로 기능하였다고 할 수 있다
* 통일신라시대의 금산
통일신라시대의 금산은 백제시대의 진내군 또는 진내을군에서 진례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아직까지 금산지역에서 통일신라시대 유적이 정식으로 발굴조사된 사례는 없지만 보석사와 신안사 태고사 등 삼국시대에 창건하여 통일신라시기에 법등을 꽃피웠던 것으로 전하는 사찰들이 있다 또한 8-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음지리 금동여래입상 등 관련 유물이 수습된 사례가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유적이 앞으로 발견될 가능성은 크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실
* 금산의 고려시대
통일신라 말 왕건이 건국한 고려가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함으로써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었다 고려는 중앙 집권 강화를 위해 전국을 5도 양계로 재편하고 그 밑에 주·군·현을 두었다 그 중 주와 군에만 지방관을 파견하고 그 외 군·현을 그에 속하게 하여 간접적인 지배를 받도록 하였다
940년 진동현(현 진산면)과 무풍현(현 무주군)이 진례군에 통합되었다 성종대에 진례군에서 진례현으로 강등되었으나 1012년에 5도 양계체제가 완비됨에 따라 다시 금계군으로 승격되어 전라도에 속하게 되었다
1305년에 김신이 공을 세워 그의 고향인 금계군을 금주로 승격시키고 지금주사라는 지방관을 직접 파견하여 주변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 현재의 금산이라는 지명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 금산의 고려시대 문화재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성행하여 사찰과 석탑, 불상 등 불교 관련 문화재의 건립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각 지방세력과 민중이 직접 건립을 발원하고 추진함으로써 전국으로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금산에는 고려시대에 조명된 것으로 추정되는 탑고 불상이 남아있다 탑은 모두 3기로 탑선리 석탑과 아인리 석탑, 숭암사 3층석탑이다 탑선리 석탑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326호, 아인리 석탑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327호로 지정되어 있다 3기 모두 3층 석탑으로 허물어졌던 것을 다시 세워 보존하였으며 일부 부재는 멸실되었다 탑선리 석탑 주변에서 연꽃무늬 석등대좌, 아인리 석탑 부근에서 '금귀대덕'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미륵사에는 고려시대 석조불두와 마애불편 석조가 남아있으며 발굴조사 결과 고려시대 기와와 막새가 출토되었다
그밖에 제원면 천내강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는 용석과 호석이 남아있다 천내리를 기준으로 왼쪽에 용석, 오른쪽에 호석이 위치하여 좌청룡·우백호의 방향을 따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홍건적의 난 때 피난갔던 공민왕이 풍수지리에 의한 대길지를 찾다가 금산을 발견하여 자신의 왕릉으로 삼고자 용호석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 금산의 인물
금산은 예로부터 효자와 충신 등 뒤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한 충절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금산이 충절의 고장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단초는 고려시대 성리학을 공부한 학자들이 머물며 충효 실천의 좋은 전통을 전한데서 비롯되었다
고려 말의 대학자 길재와 박힐은 고려가 망하자 조선 왕실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옛 왕조에 대한 의리와 충성을 지켰으며 한교와 윤택은 병든 어머니를 곁에서 지키며 부모님에 대한 효를 실천하는데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이 모든 인물들의 이야기는 후세로 전해져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또 다른 충신과 효자들을 배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길재의 이야기 등은 후에 '삼강행실도'등으로 만들어져 후세에 전해졌으며 한교의 이야기는 '효자리'라는 지명을 통해 현재까지도 귀감이 되고 있다
조선시대실
* 조선시대의 금산
1392년 조선이 들어선 후 전국을 8도로 나누면서 금산 지역은 전라도에 속하게 되었다 건국 이듬해에 태조의 태를 금산의 만인산에 모신 후 진산 일대는 진주군으로 승격되었고 1413년에 진산군으로 확정되었다 이때 금주군 역시 금산군으로 개칭하여 금산지역은 크게 금산과 진산의 두 행정구역이 공존하게 되었다
금산지역은 조선시대 500년 동안 역사적 사건의 주무대로 활약하였다 1592년 임지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를 목표로 했던 왜군이 그 관문으로 여기고 침입했던 곳이 금산이었고 이에 금산지역에서는 이치전투 등 다섯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많은 애국지사가 순절하였으나 결국 왜군의 전라도 침입을 막아낸 기념비적인 장소이자 임진왜란 승리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한편 1791년에는 진산에 거주하던 천주교 신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종교적 신념에 따라 제사를 거부하고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진산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는 조선의 성리학적 질서를 강조하던 조선 정부와 천주교의 교리가 최초로 크게 부딪힌 사건으로 이후 천주교 박해의 시발점이 되었다
* 금산의 5대 전투 ㅣ 개티전투, 눈벌전투, 이치대첩, 연곤평전투, 횡단촌전투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로 조선 대부분의 지역은 왜군에 의해 유린되었다 20여일 만에 수도 한양을 함락시킨 왜군은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을 공략하려 하였다 결국 왜군은 전라도의 관문인 금산지역으로 향했고, 조선의 관군과 의병은 금산지역에서 왜군을 저지하려 하였다 이에 금산 일대에서는 크고 작은 다섯 차례의 전투가 발생하였으며 이를 금산의 5대 전투라고 한다
당시 금산에서 전라도의 수부였던 전주로 향하는 길은 용담-진단을 거쳐 웅치로 향하는 길과 금산-진산을 지나 이치로 향하는 두 고갯길이 있었다 조선의 관군과 의병은 이 두 고갯길을 막고 금산을 지켜내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계속하였으며 이치대첩의 승리를 통해 왜군의 전라도 침입을 좌절시켰다
* 진산사건과 진산성지
진산사건은 조선시대인 1791년에 일어난 최초의 천주교도 박해사건으로 신해사옥이라고도 한다 1791년 진산군의 선비 윤지충과 권상연이 윤지충이 모친상 때 어머니 유언을 따라 신주를 모시지 않고 천주교식 의식으로 상을 치렀다 이를 두고 조정에서는 논쟁이 벌어졌고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여 국문하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관의 회유와 고문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신념을 지켰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들이 유교적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부모도 임금도 없이 여긴다'는 무부무군의 사상을 신봉하였다는 죄명으로 전주 풍남문 밖에서 사형에 처했다 이후 조정에서는 이 일을 둘러싸고 천주교를 용인하는 온건한 이들과 천주교를 막아야 한다는 이들로 나누어져 대립하였으며 결국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박해가 일어난 진산지역에는 그 이후에도 천주교신자들이 숨어살면서 신앙을 이어갔다 1927년에 진산성지 성당이 지어졌으며 2017년 등록문화재 제 682호로 지정되었다
*금산의 동학농민운동
1860년 네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조선후기 민생의 혼란과 함께 교세가 날로 커졌다 이에 금산지역은 일찍부터 동학이 유입되었고 1890년대에 인근 고을인 황간의 조재벽이 금산고 진산 일대로 포교하면서 그 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1894년 3월 18일 전봉준 등이 전라도 고부에서 봉기하여 1차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했다 그러나 금산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서서 재원역에서 서장옥을 중심으로 수천의 농민들이 죽창과 농기루를 들고 봉기하였다 농민군은 금산읍 관아를 습격하여 김원택 등 향리를 잡아 가뒀다 이후 진산 방축점에 동도소를 설치하였으며 일부는 전라도의 농민군과 합류하였다 금산에서는 동학농민군과 양반유생 등이 조직한 민보군이 서로 대립하였으며 몇 차례에 걸쳐 전투가 벌어졌다 그 결과 금산은 민보군이 진산군은 동학농민군이 장악하여 서로 대치하였다
전주화약의 체결로 농민군의 해산하였으나 일본군이 주둔하여 내정간섭을 일삼자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신식무기로 무장인 일본군과 정부군의 공격에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금산에서는 10월 22일 부수암 일대에서 전투가 벌여져 김개남이 이끄난 동학농민군이 민보군을 물리치고 다시 금산군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11월 이후 동학농민군의 주력군이 패하고 금산 인접지역으로 진출한 일본군의 반격에 금산과 진산의 동학농민군은 대둔산에 머물며 끝까지 저항하였다 마침내 이듬해 1월 일본군과 정부군의 진압으로 금산의 동학농민운동은 대둔산에서 끝이 났다
금산지역은 동학농민군 최초의 기포자이자 최후까지 저항한 동학농민운동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근현대실
* 금산의 근대
1876년 일본은 '강화도조약'으로 개항한 뒤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본격적인 절차를 진행하였다 을사조약의 체결로 실질적인 국권을 박탈당하자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금산지역에서도 공주 출신 의병장 노원섭, 경남 함양출신 문태서, 문태서 부대에 속한 금산 출신 강이붕, 김백원 등이 활동하였으나 대부분 체포되거나 순국하였다
한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힘을 기르기 위해 학교 설립 열풍이 불자 금산에서도 1907년 사립 금산학교를 비롯한 신식학교의 설립이 이어졌다 일본으로부터 짊어진 외채를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금산에서도 지역 유생, 관인들이 주도하여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일본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하고 일제강점기가를 맞았다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우리민족의 전통을 말살하고 인적, 물적 자원을 철저하게 약탈하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1914년 식민지 정책 편의를 위하여 행정구역을 개편하게 되는데 금산지역에서는 진산군이 금산군에 통합되었고 부남면은 무주군에 속하게 되었다 진산군과 금산군의 21개면은 통폐합하여 10개면이 되었다
2층 / 금산생활민속관
금산 세계문화
금산전통문화
* 금산, 긴 물 깊은 산의 고장
금산군은 다른 충청남도 지역과 달리 지리적으로 높고 험한 산지가 발달되어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1962년까지 전라북도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금산군은 다른 충청남도 지역과 다른 독특한 생활문화의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
산지로 둘러싸인 지형적 특성으로 승계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으며 금산의 농악에는 전라좌도농악의 특징이 녹아있다 생업에서는 금산만이 가진 인삼농사의 기술이 전해지고 있으며 금산에서만 볼 수 있는 탑신앙과 문생계의 전통이 살아 숨쉬고 있다
금산군은 금산의 전통문화를 발굴, 보존, 계승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1건, 도지정 무형문화재 4건이 지정되어 있다
* 금산 인삼의 시작
금산에 인삼이 처음으로 전래된 시기에 대해서는 강처사와 관련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백제시기에 강처사라는 사람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진악산 아래 살았다 어느 날 병든 어머니를 위해 진악산 관음굴에 가서 기도하던 중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붉은 열매 세 개가 달린 풀의 뿌리를 달여서 드리라고 알려주었다 그 말대로 했더니 어머니의 병이 나았고 강처사는 그 풀을 인삼이라 하고 남이면 성곡리 개안 마을에서 재배를 시작했다고 한다
* 금산의 농악
금산에서는 농악을 '풍장을 친다'고 하였으며 두레에서 기원하는 두레풍장과, 송계의 두레 풍장, 걸립굿 등을 통하여 유래되었다 금산의 농악은 전라도와 인접해 있기 때문에 호남좌도농악과 유사한 특성을 띄면서 금산만의 독특한 풍물굿 형태가 남아있다 판제를 살펴보면 호남좌도농악의 특성을 그대로 담고 있으면서 금산지역의 특성을 반영하는 매굿이나, 마을축원구스 짐승을 몰기 위한 몰이굿 등이 남아있다
어린이 체험
이치대첩 특별전
* 2023년 12월 15일까지 진행
이치대첩은 1592년 곡창지대인 호남을 점령하기 위한 왜군의 침입을 금산군 진산면에서 물리친 전투이다 왜군은 조선에 남은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을 점령하기 위해 당시 가장 유명한 장수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보냈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고 있던 조선군은 이치에 권율 장군과 황진 장군을 배치했다 하루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1,000여 조선군은 열 배가 넘는 10,000여 왜군을 격퇴했다
그 결과 왜군은 전라도 침공을 포기하고 보급 문제로 북진을 멈춘 채 평양에 머물러, 조선은 명군이 개입하고 조선군이 전열을 다듬을 시간적 여유를 얻었으며 다시 말해 전쟁의 국면이 역전됐다 이에 조선와조실록과 연려실기술에서는 왜군이 이치대첩을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았으며 그중에서도 첫째로 쳤다는 기록을 남겼다 권율 역시 이치대첩의 승리를 행주대첩에 비해서도 우위로 치며 사위인 오성 이항복에게 '호남지역을 보전하여 국가의 근본이 되게 한 점'을 들어 최고의 승리라고 회고했다
이처럼 이치대첩은 임진왜란 초기 육전에서 전세를 뒤엎는 전기를 마련한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592년 전쟁의 파도를 멈춰 세워 고갯길, 왜군의 침략에 조선이 가장 위험했던 순간 고개를 지켜 나라를 구하려 했던 이들의 사투를 기록했다
금산이라 도시를 제대로 공부한 기분이다(학창시절 역사 공부를 이렇게 했다면 국사 포기자가 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박물관 투어를 종종하는데 그 도시에 빗대어 역사를 표현해 현재와 과거를 아우르며 재밌게 관람했다
관람 중간 영상물들이 재미를 돋우는데 도움이 되었고 스탬프 투어 용지에 퀴즈를 풀면서 하느라 빠짐없이 둘러봤던 것 같다
스탬프 투어를 다 마치면 텀블러도 증정하니 꼭 참여하길 바란다
무엇보다 이곳에 방문한 이유는 이치대첩 특별전에 대한 영상을 관람하기 위해서다
오는 12월 15일까지 영상을 관람할 수 있으니 꼭 방문해 보길 바란다
아이들을 위한 체험 요소도 만나볼 수 있으니 아이와 함께 방문해도 무리 없이 관람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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