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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쉬어가삼[례:] / 삼례 아이랑 가볼만한 곳
    places to visit 2024. 4. 10.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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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례 투어 다음 편은 쉬어가삼 [례:]이다

     

    삼례문화예술촌(아래 글 참고)을 둘러보고 주차장 광장으로 나오면 쉬어가삼 [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냥 옛날 기차역 건물을 보존 중이겠지 라는 생각에 화장실만 이용하려다 들어가 보고 당황했다 

     

    그냥 건물을 보존 중인 상황이 아니라 삼례 역사를 잘 나타낸 곳으로 쉼터이기도 하면서 삼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곳이었다 

     

    문 열고 들어가 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이 장소에 대한 정보를 남겨보려고 한다 

     

     

     

     

     

     

     

     

     

     


     

     

     

     

     

     

     

     

     

    삼례 투어 / 쉬어가삼 [례:]

     

     

     

     

     

     

     

     

     

    쉬어가삼[례:]

     

     

     

     

     

    ? 쉬어가삼 [례:]

     

    쉬어가삼 [례:]는 과거 삼례역이었던 건물을 완주역사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여 삼례역 100년의 역사, 완주 의병의 역사 콘텐츠 전시와 

    독서, 여행정보안내, 공유인터넷 등을 사용할 수 있는 여행자 쉼터로 조성하였다 

     

    원래 삼례 일대는 일제강점기 수탈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의 현장이며 동학 농민혁명 봉기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랬던 삼례는 문화 예술과 책, 문화재가 어우러진 문화 예술의 장이 되었다

     

    쉬어가삼 [례:]는 의병, 역참, 여행자쉼터 3가지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바닥에 있는 의병, 역참, 여행자쉼터 3가지 화살표를 따라가다 보면 나라를 지킨 완주의 의병과 역참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나와 있다 그리고 여행자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이 마련된 여행자 쉼터는 누구나 편안하게 쉼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누워서 책을 볼 수 있는 컬러풀한 빈백과 이색적인 테이블 공간을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다

     

    쉬어가삼 [례:]를 중심으로 삼례문화예술촌, 책박물관, 대한민국술테마박물관,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놀토피아 등이 있어 같이 둘러보기 좋다

     

     

     

     

     

     

    ■ 위치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삼례읍 삼례역로 85 쉬어가삼 [례:]

     

     

     

     

     

     

     

     

     

     

     

     

     

     

    ■ 주차장 및 이용시간

     

     

    ▶ 쉬어가삼 [례:] 바로 근처 광장에 주차 / 무료

     

    ▶ 10:00 ~ 18:00 / 무료 관람

     

     

     

     

     

    ■ 상세정보

     

     

     

    역참

     

    역참(지리적 거점에 설치되어 조정의 문서를 전달하고 외국 사신을 맞아 접대하는 등의 일을 위하여 마련된 교통, 통신 시설로써 공공의 기별, 역마, 역원 등 여행 체계를 합쳐서 이르는 말은 전통시대 공공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설치된 교통 통신기관이다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 전달, 변방의 긴급한 군사 정보 및 외국 사신 영접, 공공 물자 운송 등을 위하여 설치된 교통 통신기관이다

    죄인 체포, 압송, 통행인 규찰, 유사시 국방 임무까지 담당했다

     

    문헌상 삼국시대부터 설치된 것으로 나타나며, 고려시대부터 전국적으로 체계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운영되었다

    고려의 제도를 토대로 정비된 조선의 역참제도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기능이 마비되었고, 이후 군사 통신수단으로 파벌제가 도입되어 역의 통신기능의 일부를 대체했다 

     

     

     

    ▶ 삼례역

     

    조선시대 전라도 일대의 역로를 관할하던 삼례도의 중심이 되는 본역으로 찰방이 주재하던 역이었다  당시 전주부에 속했던 삼례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전라북도 일대를 관할하던 역로였으며 전주 반석역, 앵곡역, 임실 오원역 갈담역, 임피 소안역, 함열 재곡역, 여산 양재역, 태인 거산역, 정읍 천원역, 고부 영원역, 부안 부흥역, 김제 내재역 등 모두 12개를 거느렸다

     

    고려시대 역로 가운데 하나인 전공주도에 속했던 삼례역은 조선시대에 전국적인 역로가 정비되면서 삼례도에 속하게 되었다

    전공주도에는 총 21개의 역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삼례역은 그중 남쪽에 위치한 역이었다  조선 세종 때 전국적인 역로 조직이 재편되면서 반석역, 오원역 등과 함께 전라도 삼례도를 관할하는 역이 되었다  삼례역은 고려시대 거란군이 침입했을 때에 현종이 피신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 콩쥐팥쥐 설화

     

    완주군 이서면에 전하는 콩쥐팥쥐와 이야기로 완주가 문화적 전통이 살아있는 고전문학의 중심지였으며 한글소설 출판문화의 고장임을 입증시켜 준다

     

     

    [조선 중기 전라도 전주부 서문 밖 삼십 리(12km)에 살던 최만춘이라는 퇴직 관리와 아내 조 씨는 뒤늦게 딸 콩쥐를 얻는다

    그러나 콩쥐가 태어난 지 백일 만에 조 씨가 죽고 아버지 홀로 딸 콩쥐를 키우다가 과부 배 씨를 후처로 들인다

    이후 최만춘은 배 씨를 믿고 집안을 돌보지 않았고 새어머니 배 씨는 자신이 데려온 딸 팥쥐만을 편애하고 콩쥐를 괴롭힌다

    새어머니 배 씨는 콩쥐에게 나무 호미로 산비탈의 자갈밭 매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베 짜기, 곡식 빻기 등의 고된 일을 시키는데

    그때마다 검은 소, 두꺼비, 선녀 새떼 등이 나타나 콩쥐를 도와준다

    그런 이유로 콩쥐는 더욱 괴롭힘을 당하지만 결국 선녀가 준 신발 덕분에 전라감사와 혼인하게 된다

    콩쥐가 꽃신 한 짝을 잃어버리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계기로 새어머니 팥쥐가 저질러온 나쁜 행동이 만 천하에 드러났고 그들의 악행은 콩쥐가 시집간 뒤에도 이어진다

    하지만 두 모녀는 죄에 합당한 벌을 받게 되고, 전라감사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콩쥐팥쥐 배경마을 찾기는 소설 첫머리에 언급되고 있는 '전주 서문 밖 30리'라는 비교적 구체적인 지역성을 바탕으로 시작했다

    '전주 서문 밖 30리'는 현재 서문(전주 다가파출소와 서문교회 사이)으로부터 정서향에 위치한 지점, 대동여지도와 1872년 규장각지도를 근거로 앵곡마을을 포함한 이서지역 일대가 해당된다

     

     

     

    쉬어가삼[례:]

     

     

     

     

     

    의병

     

    국가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국민이 자발적으로 조직하는 자위군으로 국가의 명령이나 징병을 기다리지 않고 자원 종군하는 민군이다  우리나라 의병 전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비롯되었고 고려, 조선, 시대를 거쳐 조선 말기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조선 말기의 의병은 항일 독립군의 모태가 되었다  이같이 오랜 의병의 역사로 인하여 특유의 의병 정신이 조성되어 승패를 가리지 않고 죽음을 결심하고 과감히 전투하는 것을 의병의 본분이라 여기게 되었다

     

    나아가 의병 정신이 곧 한민족의 특성이라고까지 믿게 되었다  이러한 믿음을 피력한 학자로 박은식을 들 수 있다

    그는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요 국성이다'라고 하면서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즉, 우리 민족은 역대 항중, 항몽, 항청, 항일의 투쟁 속에서 무력이 강한 국민성을 갖게 되었고, 이 때문에 어느 침략자로부터도 정복당하거나 굴복하여 동화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완주의 역사에서도 나라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나라를 지키고 구하기 위한 의병들이 나타났다 

     

     

     

    ▶ 완주 동학농민혁명 /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침략하는 외세에 대항하다 

     

    완주에서 알려진 최초의 동학교도 박치경은 1884년 6월,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익산 사자암에 은신할 때 모든 편의를 제공했다

    이를 보아 박치경의 동학 입교는 1884년 6월 이전으로 추정된다

    박치경은 1894년 1차 동학농민운동 당시 고산 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1892년 10월과 1892년 11월 사이에 동학에서는 교조신원운동을 공개적으로 전개했다  억울하게 죽은 최제우의 사면복권과 동학의 공인을 요구한 교조신원운동은 1893년 서울 광화문 복합상소, 보은취회, 금구취회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종교운동이었으나 점차 정치투쟁으로 바뀜으로써 뒷날 동학농민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삼례집회에서는 교조 최제우의 신원, 동학 공인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동학교도에 대한 침탈과 착취를 금지시키겠다는 전라감사의 답을 얻음으로써 일정한 성과를 거둔다

     

    1894년 1월 10일  새벽,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고부관아를 점령하면서 혁명이 시작되었다  혁명은 무장기포, 백산대회, 황토현전투, 황룡전투 등을 거친 후 전주성을 점령함으로써 최대 승리를 거두었다

    청일 양군의 조선 상륙과 동학농민군 내부문제 등으로 전주성에서 철수한 동학농민군은 1894년 9월까지 전라도 각지에서 집강소 체제를 운영했다

     

    조선에 무단으로 상륙한 일본은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했으며 청일전쟁을 일으켜 조선의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에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은 구국항일 의병전쟁을 계획하고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해 인근 지역에서 군수물자와 병력을 보충했다

    1894년 9월, 삼례를 출발한 동학농민군은 우금치전투에서 일본군과 정부군의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남하했다  이때 일본군은 삼례를 동학농민군의 본거지로 판단하고 삼례 점령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일본군과 정부군의 일방적인 토벌작전에 맞서던 동학농민군은 1894년 11월 고산현 산천리와 고산읍에서 두 차례의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고 일부는 대둔산으로 옮겨 최후까지 항전했다

     

     

     

    ▶ 완주 대둔산 동학 항전  /  의병정신으로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다

     

    동학농민군이 대둔산에 들어가 항쟁을 시작한 시기는 1894년 11월 중순이었다  이는 1894년 11월 공주 우금치전투와 청주성전투 패배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을 받으며 남쪽으로 후퇴하였고 각자 혁명 지속과 생존 방안을 강구하게 된 결과였다

     

    처음 진산 접주 최공우와 최공우의 아들 최사문 등이 대둔산 정상 부근에 몇 칸 집을 짓고 병기와 양식 등을 갖추고 집단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인원이 증가하여 50여 명에 이르렀다  이미 기울어진 전세에도 이들이 대둔산 정상에 웅거 하면서 항쟁을 멈추지 않은 것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다

     

    전주와 공주의 병사와 진산의 민보군의 연합해 토벌에 나섰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에 1895년 2월 17일 대둔산 동학농민군 진압에 순무영 우선봉진과 일본군이 직접 나섰다

    대둔산의 활동이 장기화 될수록 인근에서 호응하는 세력과 결합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동학농민군은 끝까지 저항했으나 모두 사살당했다  성명 미상의 어린아이만 살려 두었는데 항전 농민군의 정황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동학농민군 25~26명이 최후까지 저항했으며 이들은 대개 접주 이상이었고 그 이름을 일일이 알 수 없었다

    그리고 28~29세쯤 되는 임산부가 총탄에 맞아 죽었으며 접주 김석순은 한 살쯤 되는 여자 아이를 안고 계곡으로 뛰어들어 암석에 부딪쳐 죽었다

    완주 대둔산 동학 항전은 공주 우금치전투와 청주성전투의 패전으로 혁명이 좌절될 것이 예상되었음에도 대둔산 정산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항전을 벌였으니 이것은 동학농민군이 염원하는 새 세상을 향한 불굴의 의지를 대내외에 알릴 의로운 죽음이었다

     

     

     

    ▶ 완주의 3.1 운동 / 대한의 독립을 외치다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 출신인 김병학은 1919년 3월 13일 전주 장날을 이용해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신흥학교생이던 김병학은 학교 지하실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 인쇄하면서 만세시위에 필요한 준비를 진행했다

    김병학은 신흥, 기전학교 학생들과 함께 거사 당일인 1919년 3월 13일, 채소 부대로 위장한 가마니 속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넣어 남문 장터까지 무사히 운반했으며 정오 무렵 남문에서 울려 나오는 인경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행동을 개시했다

     

    천도교, 기독교인 및 신흥학교, 기전 여학교 학생 등 150여 명은 남문시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고창했다

    이때 김병학 등은 시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했으며 기전여학교 학생들은 태극기를 나눠주었다

     

    전주 읍내에서 먼저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라북도 완주군 내로 퍼져나갔다

    1919년 3월 17일에는 전라북도 완주군 초포면 송천리 들판에서 1919년 3월 21일에는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장기리 장터에서,

    1919년 3월 24일에는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삼례리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쉬어가삼[례:]

     

     

     

     

     

    여행자 쉼터

     

     

    누구든지 편안하게 쉼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도서관처럼 책이 마련되어 있어 책을 보면서 정보도 얻고 공간을 이모저모 활용할 수 있는 것 같다

    빈백과 이색적인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어 다양하게 쉬다 갈 수 있는 쉼터이다

     

     

     

    쉬어가삼[례:]

     

     

     

     

     

     

     

     

     

     

     


     

     

     

     

     

     

     

    삼례 쉬어가삼 [례:]은 삼례를 다시 한번 뒤돌아 보게 만들었다

     

    복합문화공간으로써 공간자체를 삼례에 대한 이야기와 쉼터로 재구성한 면이 꽤 괜찮았다 

     

    겉보기에는 폐역을 보존 중인 느낌으로 알고 들어갔는데 많은 이야기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삼례에 대한 이야깃거리를 콘텐츠화하여 좀 더 접근하기 쉬었던 것 같고 도시를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이용할 수 있도록 적극 홍보가 필요할 것 같다

     

    삼례를 방문한다면 박물관이 필요 없는 쉬어가삼을 둘러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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